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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저택

가보가 보관된 곳

모리 저택

다이묘의 성에서 공작의 저택까지

19세기 말까지 모리 가문은 영주(다이묘)로서 일본해에 있는 저택인 하기성에서 현대의 야마구치 전체를 관장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더욱 현대적인 중앙 정부 중심의 형태로 흘러가면서 영주의 성 대부분은 반란을 막기 위해 파괴되었습니다.일본 전역의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모리 가문의 하기성 역시 1874년에 허물어졌습니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옛 체제의 유물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본이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모리 가문은 도쿄에 저택이 있었으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에는 살 수 있는 저택이 없었습니다.1892년, 모리 모토노리 공작은 야마구치에 직접 본가를 새로 짓기로 하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었습니다.공사는 1912년이 되어서야 진행됐고, 1916년에 저택이 완공되었습니다.

저택은 일본 건축가 하라 다케사부로가 설계했습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 속에는 전통적인 측면과 고품질 자재를 이용한 최신 편의 시설이 함께 담겨 현대 일본 건축의 명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방 60개 중에 서양식 방은 두 개에 불과합니다.

두 개의 가문 문장

저택 전반에서 모리 가문의 문양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포르트 코셰르(정문)에 들어가서 위를 올려다보면 이치니 미쓰보시(원 세 개 위로 난 가로줄 하나)와 오모다카(벗풀)가 있습니다. 이 문장들은 조명부터 미닫이문 손잡이까지 저택 전반에서 볼 수 있습니다.

Photo:The two crests of the Mohri clan사진 : 모리 가문의 문양 두 개

귀중한 나무와 고대의 나무들

포르테 코셰르의 천장은 아름다운 결을 지닌 느티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집 전체는 희귀하고 귀중한 나무로 만들어져 모리 가문의 부와 지위를 나타냅니다.집의 첫 번째 복도 바닥을 예로 들면, 대만 느티나무 판 두 장으로 꾸며졌으며 각각의 길이는 8m, 폭은 1.5m입니다.기둥과 측면 기둥은 기소의 노송나무를 사용했고, 거실의 미닫이문은 야쿠시마섬의 천 년 된 삼나무인 야쿠스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천황을 위한 내빈관

이 저택의 가장 화려한 구역이자 유일하게 2층으로 꾸며진 공간은 내빈관으로, 천황을 비롯한 중요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어졌습니다.하나로 이어진 거실(오히로마) 세 곳과 격자 천장으로 꾸며졌습니다.복도는 거실에서부터 객실로 이어져 천황를 비롯한 중요한 손님들이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사적인 공간에서 공개적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지어졌습니다.저택에는 1916년부터 1966년까지 50년 동안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기간에 다이쇼 천황이 한 번, 쇼와 천황(히로시토)이 두 번 방문하여 천황이 총 세 번 방문했습니다.

photo:Kyakuma-to사진 : 객간

경치가 있는 방

내빈관의 2층은 거대한 계단을 통해 연결됩니다. 노송나무 한 블록으로 층계참 세 개와 계단이 만들어졌습니다.보통 규모에 디자인은 격식이 없는 이 2층 공간에서는 손님들이 정원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photo:Landscape seen from the second floor사진 : 2층에서 내려다본 풍경

저택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점

모리 저택은 일본이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12세기 초반에 지어졌습니다.그 결과, 당시에는 매우 독특했던 현대적 특징이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신기술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혁신이 시작됩니다.예를 들어 진입로 입구에 있는 거대한 문은 시멘트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시멘트는 새로운 재료였습니다.저택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전화기를 갖추었는데, 그런 이유로 아직 저택의 전화번호 마지막 네 자리는 0001입니다.미국산 가정용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공급했으며,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보일러도 있었습니다.

독특한 수입품

막부 시대의 폐쇄형 국가 분위기와는 달리 1868년 이후의 일본은 세계 무역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이 점은 모리 저택에도 잘 반영돼 있습니다.예를 들어 (가족의 꽃무늬 문장이 새겨진) 모든 조명은 독일에서 주문 제작한 것입니다.

Photo:The lighting fixtures사진 : 조명

화려함과 실험

일본 다이쇼 시대(1912-26)에는 판유리가 여전히 색다른 재료였습니다.수많은 창유리는 부와 지위를 반영한 것입니다.모리 저택에서 정원을 마주하는 2층짜리 내빈관에는 최소한 15개의 창문이 있습니다.아주 특이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바람과 비를 막아주기 위한 아마도 덧문이 창문 밖이 아닌 창문 안쪽에 있다는 점입니다.창유리를 자세히 보면, 튀어나온 부분과 기포를 비롯해 고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오늘날의 기계식 플로트 유리가 아닌 먼저 바람을 불어넣은 후 납작하게 펴는 방식으로 유리를 수작업으로 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Photo:Glass windows사진 : 창유리

거대한 바위와 고대의 나무들

내빈관 안마당에 있는 소철 곁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현실적인 이유로 이 바위를 먼저 설치한 뒤 그 주위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도배하지 않은 내빈관의 미닫이문은 1천 년 된 삼나무인 야쿠스기로 만들어졌습니다.

Photo:The inner garden사진 : 안마당

모리 박물관

가보가 보관된 곳

모리 가문은 수 세기 동안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봉건제 가문으로서 수많은 보물을 축적했습니다.모리 박물관에서는 2만여 종의 수집품을 보관하고 있으며, 교대로 전시물을 선보입니다.

국보 네 점이 있어 유명한 박물관이지만, 그 외에도 흥미롭고 귀중한 전시품이 많습니다.예를 들어 모리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16세기의 영주였던 모리 모토나리가 세 아들에게 쓴 유명한 편지가 있습니다.이 편지에서 모토나리는 세 아들에게 화합을 조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화살 하나는 부러질 수 있지만, 튼튼하게 묶인 화살 세 개는 부러지지 않는다.'

수집품 중에는 막부가 쇠퇴하고 황권 강화를 이뤄낸 19세기 후반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서도 많습니다.

Photo:Exhibition room사진 : 전시실

모리 박물관의 보물들

모리 저택 박물관에는 일본 문화 유물 중 가장 귀중한 국보 네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사계절의 풍경(시키산수이즈)은 유명한 수묵화가 셋슈 도요(1420-1506)의 작품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인 16m 길이의 족자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표현돼 있습니다.각기 다른 계절은 구체적인 시각적 단서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해안의 경치, 가을에는 축제 그리고 겨울에는 눈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 후기에 만들어진 고시가타나는 사무라이가 장검 외에 예비용으로 허리띠에 직접 차고 다니던 26.5cm 길이의 단검입니다.검에 적힌 글귀는 없지만, 기술로 보았을 때 나라 인근의 다이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와카 시 모음집(고킨 와카슈)은 11세기 중반의 헤이안 시대(794-1185)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됩니다.원본 족자 20점 중 단 세 점만이 온전히 보존되었으며, 시리즈 중 여덟 번째 부분입니다.우아하고 거침없는 필체로 쓰였으며, 금가루와 운모로 장식된 가나 글씨의 명작입니다.

시키료코혼기 다이큐는 중국의 역사입니다.1073년에 만들어졌습니다.모리 가문의 조상인 오에노 레쿠니가 필사해 주석을 달았기에 더욱 특별합니다.

모리 가문

일본 서부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 지도자

16세기 후반 무렵, 히로시마에 기반을 둔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역(현재의 히로시마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돗토리현,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습니다.모리 모토나리(1497-1571) 시절, 가문의 권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동부의 현재 오카야마현에서 서부의 후쿠오카현까지의 구역을 통제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배 구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모토나리의 손자 데루모토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자 편을 들었을 때,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존 모리 가문의 영지를 1/4로 축소했습니다.히로시마에서 강제로 밀려난 가문은 1604년에 현재 야마구치현이 있는 일본해와 인접한 하기에 새로운 성을 지었습니다.이것이 하기 영지로도 알려진 조수 영지의 기원입니다.

조수와 메이지 유신

모리 가문은 일본의 군벌들이 강제로 천황에게 영지를 넘겨야 했던 1870년경까지 조수를 관장했고, 이후 봉건 제도는 오늘날의 현 체제로 바뀌었습니다.메이지 시대(1868-1912) 초기에는 지역 주민과의 유대를 끊고 문제를 일으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영주들을 도쿄에 와서 살게 했습니다.하지만 1880년 후반 들어 상황이 충분히 진정되자 당시 가문의 수장이었던 모리 모토노리 공작은 도쿄를 떠나 야마구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모토노리는 추종자 한 명에게 현대의 저택을 지을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가 찾은 곳은 다타라산 아래의 호후 평지였습니다. 온난한 기후와 내해의 절경을 안고 있으며, 항구와도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1904년이 되어서야 기찻길이 생겼습니다).

1892년, 모토노리는 가족에게 땅을 사고 나무를 비축하라고 말했습니다.하지만 청일 전쟁(1894-1895)과 러일 전쟁(1904-1905)으로 공사 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마침내 1912년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5년 후 저택이 완공되었습니다.모토노리가 1896년에 죽자, 모리 모토아키라 공작(1865-1938)은 1916년에 이 집에 들어와 거주한 첫 번째 거주자가 되었습니다.

この翻訳について

このサイトの解説文は観光庁の地域観光資源の多言語解説整備事業で作成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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